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레 해전 (문단 편집) == 칼레 해전 그 후 == 무적함대의 괴멸을 계기로 잉글랜드가 [[대서양]]의 제해권을 쥐었다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과 차이가 있다. 칼레 해전 이후로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스페인에겐 지중해함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무적함대를 격파한 다음날인 8월 9일, [[엘리자베스 1세]]는 틸버리 항에 주둔한 영국 육군을 친히 찾아가 그들을 격려했다.([[틸버리 연설]] 참조) 다음 해인 1589년, 잉글랜드는 훗날 '잉글리쉬 아르마다(English Armada)'라 불리우는 대규모 원정군을 스페인 갈리시아의 라 코루냐 항에 보내 남은 스페인 함대를 파멸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성공적인 방어로 인해 1만 2천에 달하는 병력만 잃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스페인이 칼레해전에서 무적함대를 잃은 것보다 훨씬 큰 피해다. 이 원정의 실패로 잉글랜드 역시 스페인과 전면적인 해상 교전을 벌일 능력을 상실했다. (아르마다란 이름에 마가 끼었던 모양이다) 한편 스페인은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였고, 스페인과 싸우던 잉글랜드는 네덜란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1596년) 그리고 스페인 함대는 재건되어 다시 1596년과 1597년 잉글랜드를 공격했지만 폭풍 등으로 인해 패배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98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에 사망하였으며, 두 나라 모두 전쟁으로 인한 재정 문제는 가중되는데, 그 해결책의 전개는 영 신통치 않았기에 1604년에 평화 협정을 맺는다. (1604년 런던 조약) 잉글랜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고 종교적 자유를 얻었으며 가톨릭 신앙을 계속 박해할 수 있었다. 스페인도 잉글랜드 해협과 항구들의 개방, 잉글랜드의 [[사략선|사략질]] 및 네덜란드 독립군에 대한 지원의 전면 중단이라는 결과를 얻는다. 이것이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585~1604)의 끝이었다. 이후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1625년까지 평화를 유지했다. (이후는 [[30년 전쟁]] 참고할 것.) 대체적으로 양측 다 만족할만한 협정이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스페인과 전쟁 중인 동맹 [[네덜란드]]를 버린 굴욕적인 협정이라는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607년 지브롤터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였고, 1609년 휴전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후 [[30년 전쟁]]을 거치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스페인은 통념과 달리 이 전쟁으로 크게 몰락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동안은 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남았지만, 30년 전쟁 등을 거치면서 네덜란드를 잃어버리고 국력이 추락하는 등 전성기의 위상을 잃게 된다. 반면 잉글랜드는 전쟁 중 자금 조달을 위해 [[동인도 회사]] 등 [[주식회사]]란 것을 개발하여 상업에 대한 힘을 키웠으며, 해양 개척에 힘을 쏟아 1607년에 동인도 회사가 [[북아메리카]]에 [[제임스타운]]을 세우는 등 해양 강국의 기틀을 쌓아가게 된다. 그래서 [[대영제국]]의 시발점을 이 시기(1607년)로 꼽는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1588년에 무적함대를 격파한 직후의 잉글랜드 상황은 극적인 변화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이전 만큼이 아니었을 뿐 아직 건재한 스페인의 존재로 인해 여전히 쉽지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한동안 해양 강국으로서 위세를 떨친 것은 독립한 [[네덜란드]]였으며, 영국이 바다의 패권을 공고히 가지게 된 것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영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18세기부터였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엘리자베스1세의 업적이기도 하다. 또한 전반적인 경위를 살펴보았을 때 스페인의 망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허술한 전략과 부실에 부실을 거듭한 준비로 스페인이 자발적으로 패배를 향해 돌진한 것과 다를 바 없기도 하다. 결국 잉글랜드의 화공이 성공하여 무적함대를 격파했지만, 남미대륙 등 거대 식민지들에서 막대한 재보를 끌어올 수 있는 스페인은 얼마 안 가 무적함대와 비슷한 규모의 해군력을 재건해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 만에 두 차례의 잉글랜드 원정을 시도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했고, 전쟁 이후로도 수십 년이 지나고 한 세기가 바뀔 동안 양국의 적지 체급 차이는 여전했다. 한국사의 [[여요전쟁]] 때, 고려원정의 대실패로 큰 손해를 입은 요나라가 이를 극복하고 이후 반세기 이상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상을 유지했던것과 흡사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스페인이 통상적인 수준으로 전쟁을 준비한 뒤 싸웠더라면 오히려 잉글랜드가 심각한 타격[* 사략질로 얻은 재정적 이득보다 훨씬 큰]을 입었을 것이다. 이러한 국력 격차와 상대의 침공력, 아국의 빈약함을 모두 무시하고 도발을 날린 건 어찌보면 그리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